외모지상주의 특집3. 문화산업이 일군 폐허: 외모지상주의

편집위원 제인 prinjane@naver.com

 

미디어 속 셀럽들에게 아름다움은 면죄부다. 아름다운 사람은 무언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아름다우니 그걸로 됐다. 능숙하면 노련해서 좋고, 부족하면 친근해서 좋다. 반면에 추한 사람은 무언가를 잘하든 못하든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무언가에 능숙하다면 “이거라도 잘해야지”라는 말을 들으며, 부족하다면 “역시나 그렇지”라는 반응을 받는다.

어딘가 이상하다. 모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쁘다고 하는데, 심의를 거쳐 송출된 방송에서 외모를 칭찬하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상황은 만연하다. 1인 미디어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벌어진다. 예쁘고 잘생긴 크리에이터는 노래를 못하거나 춤을 엉성하게 춰도, 심지어 가만히만 있어도 호의적인 반응과 후원이 한가득이다. 한편, 간접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항상 아름답거나 아름다워지며, 방송에서 추하다고 표현해도 사실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SNS 꿀팁이나 광고는 예쁜 종아리와 넓은 어깨를 갖는 방법을 친절히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미디어로 둘러싸인 현실의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한다. 미디어에서 입이 나온 연예인을 희화화하면 그와 닮은 사람을 놀리거나, 방송에서 칭송하는 ‘애플힙’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식으로 말이다.

‘외모지상주의는 나쁘다’는 우리 사회에서 꽤 당연한 명제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생활과 맞닿아 있는 대중문화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아름다움을 주입하는 상황들은 진작에 사라졌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재현된 외모지상주의는 굳건하며, 딱히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 같지도 않다.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사회의 시선과 맞서 싸우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잠시일 뿐이다. 곧 ‘추’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우먼이 등장한다. TV 프로그램, 광고, SNS, 유튜브에서는 하나같이 외모지상주의를 강화하는 내용이 반복한다. 이쯤 되면 문화산업과 외모지상주의의 결합은 우연이 아님이 확실하다.

따라서 이 글은 문화산업 전반이 왜 외모지상주의를 재생산하는지, 어떻게 재생산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문화산업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고민 중 가장 먼저 대중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주체, 문화산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1. 문화산업은 산업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산업은 문화적 성격의 상품과 서비스의 창조와 생산, 유통에 관련된 산업을 의미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에 따라, 거대 규모의 문화 산업체들은 전 지구적 규모의 시장을 두고 경쟁하며 문화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각주1) 이를 바꾸어 말하면 문화산업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정의하듯 자본주의적으로 대량생산된 대중문화를 의미한다. 대중문화는 대중이 아니라 산업 구조에 의해 상품으로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대중문화 대신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광고와 영화, TV 프로그램, SNS, 1인 미디어, 대중음악은 질적인 차이,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다. 문화산업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며, 생산물의 아름다움이나 독특한 표현방식은 다른 산업체의 생산물과의 차별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다수의 관심, 다수의 관람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며, 대중은 소비자이다.

문화생산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문화를 생산∙배급하는 일에는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논리가 적용된다. 문화는 이미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방송사가 다른 산업의 기업에 종속되어 있거나 영화산업이 은행업에 매여있는 등 많은 산업들과 얽혀있다. 따라서 문화산업의 목적은 소비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수익의 확대이며, 문화산업은 대중이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이끌고, 동질성을 내포하지 않은 것은 탈락시키거나 포섭하여 대중에게 동질성을 주입한다. 영세한 규모로 운영되는 1인 미디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거대 규모의 문화 산업체(각주2)들이 대부분의 문화 흐름을 생산하고 문화 생산물을 생산∙공개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따라서 개인의 문화생산(1인 미디어, SNS)도 거대 산업체들이 만들어 낸 방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또한, 1인 미디어 역시 전통적인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다. 따라서 1인 미디어도 대중문화가 대중에게 주입하는 동질성을 내재하게 된다. 1인 미디어의 범람을 뒤집어 말하면 거대 산업체에 의한 개인 문화의 대량 생산이다.

문화가 상품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상품은 문화화되어있다. 문화는 전통적인 문화 산업체(출판사, 방송국, 영화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상품이 문화가 되는 방식을 통해서도 생산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상품은 디자인, 광고 등 문화적 요소를 통해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트렌드와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는 심미적인 대상이 되었다. (각주3) 예를 들어 여러 커피 중 스타벅스 커피를 구매함으로써 소비자는 스타벅스 커피의 디자인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결정한다. 또한, 스타벅스 텀블러의 디자인은 음료를 따라 마시는 사용가치를 넘어 관람의 대상이 된다. 이는 스타벅스 텀블러의 경쟁력을 높여 스타벅스의 수익 창출로 이어진다. 상품화된 대중문화와 문화화된 상품 모두 상품 판매, 이윤 창출을 끊임없이 가능하게 하는 동질화된 의식을 내포하고 대중에게 주입한다. 이 글은 동질화된 의식 중 하나, ‘몸의 정상성’에 집중하여 문화산업이 어떻게 대중에게 정상성을 주입하고,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목한다.

 

  1. 정상성은 필요를 이끌어내고, 필요는 소비를 이끌어낸다

대량생산체제는 욕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한 것만을 욕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화장대는 이미 화장품으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를 외치며 또다시 화장품을 산다. 음영 아이섀도우는 넘치지만 예쁜 연예인이 바르고 있는 저 섀도우가 꼭 필요해 보인다. 섬유유연제 광고를 보면 평소에 냄새에 무관심한 사람도 왠지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향기 나는 제품을 사야 할 것만 같다. 건강프로그램을 보면 평소 건강에 이상이 없던 사람도 영양제를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대상은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은 필요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대중의 욕망을 이끌어 내는 문화 산업의 기저에는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체제가 있다.

판매를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대량생산체제는 대중이 필요한 것만을 욕망해서는 유지될 수 없다. 판매가 달성되어야만 이윤이 창출되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더 많은 소비가 필요하다. 또한, 대량으로 공급되는 생산품들은 소비되지 못한 채 재고로 쌓이면 가치를 갖지 못하며, 이는 그 자체로 기업가들에게 큰 비용이다. 따라서 기업은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중간 광고와 드라마 속 립스틱을 바르는 여주인공과 건강에 대한 위협을 통해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시킨다. 그리고 이 강요된 욕망은 사람들의 필요를 자극한다. 이제 사람들은 미디어에서 욕망하라고 시킨 것을 필요하다고 느끼며 소비한다.

욕망을 촉발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정상성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사람들을 줄 세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다. 문화산업은 소비패턴, 사용하는 물건, 사회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도 전형적인 인간, 정상적인 인간을 규정해 버린다. 이러한 정상성은 구체적인 목표도, 기준도 없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달성할 수 없는 허구적인 것이다. 이로 인해 정상성의 경계는 원활한 신체 기능을 뛰어넘어 장애가 없음, 보기에 문제가 없음, 신체 부분들이 모두 아름다움(이를테면 눈썹과 쌍꺼풀의 모양과 목주름의 양과 발목 굵기)까지 이미 확장했다. 정상성의 기준은 끊임없이 확장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떤 노력에도 정상이 될 수 없다. 문화 생산자들은 이를 이용해 대중에게 새로운 미의 기준, 구체적인 상품을 갈망하라고 종용한다. 서열에 갇힌 개인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소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상성을 통한 자극은 소비 촉진에 가장 기본 되는 것,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또한, 문화산업은 자신이 생산한 문화에 사람들을 묶어두기 위해서, 수익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야 한다. 자동차, 통조림뿐만 아니라 대중문화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사회에서 생산자 간의 경쟁이 발생하며, 각각의 문화생산물에는 차별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각각의 대중문화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회를 그대로 답습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콘텐츠를 만든다. ‘정상’적인 것은 더 ‘정상’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은 더 ‘비정상’적으로 그려낸다. 이로 인해 대중문화는 ‘정상’에서 벗어난 이들을 혐오하는 표현을 쉽게 답습하고 재생산한다. 직접적인 발화 외에도 소수자를 특정한 방식으로만 그리거나 혐오를 내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겉모습에 대한 정상성을 규정하는 외모지상주의를 차용하는 것도 보편적인 방법이다. 타인의 외모를 희화화한 개그뿐만 아니라, 신체에 무리가 갈 정도로 마른 몸매와 작고 하얀 얼굴을 칭송하고 이러한 외모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 더 탄탄하고 멋진 몸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쏟아내는 것은 미디어에서 신체의 정상성을 답습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TV 프로그램, 영화뿐만 아니라 개인 미디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에서 모호하게 존재하던 정상성은 미디어에서 재현되면서 진정으로 ‘정상’적인 것이 된다. 이제 정상성은 각종 미디어와 우리의 실생활에 널리 퍼진다. 계속해서 정상적인 것은 정상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미디어에서 ‘건강하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더 이상 신체가 잘 기능하는 상태, 조작되지 않은 모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단어들은 가장 많이 조작된 것,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아름답고 얻기 힘든 것을 의미하며, 정상성을 재생산하는 데 가장 유용하게 사용된다. 가장 자연스러운 바람을 내보내며 건강을 생각한 기능들을 탑재했다고 자랑하는 에어컨 광고가 그러하듯이, 완전히 통제된 식물들을 전시한 곳에 가서 자연을 느끼라고 말하는 TV프로그램들이 그러하듯이, 단백질 셰이크와 영양제를 먹고 인공 태닝을 한 연예인의 몸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몸으로 그려진다. 이제 표준체형의 몸, 신체가 잘 기능하는 건강한 몸은 부자연스럽고 비만인 몸이 된다.

재현된 정상성은 현실이 된다

문화 생산자의 의도와 미디어의 특성, 기술발전으로 인해 연예인의 몸이 현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미디어는 사실을 그대로 투영할 수 없다. 현실을 그대로 담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카메라의 각도, 영상 및 사진의 크기, 편집 과정에 따라 현실은 왜곡된다. 미디어는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기도 한다. 타인의 연애과정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에서 심장 소리와 배경음악과 아기자기한 자막들로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실제가 아니지만, 시청자에게는 현실처럼 보이며 시청자에게 이와 유사한 반응을 일으킨다. 이처럼 미디어에 재현된 모습은 사람들에게 재현된 것이 아닌 ‘사실’ 그 자체이다. 왜곡된 현실을 사실처럼 보여주는 미디어의 특성과 자신이 재현한 것을 사실처럼 보이게 해 대중의 시간을 점유하려는 미디어 제작자의 의도 때문이다.

특히 문화산업이 대중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고 기술 발전에 따라 세계가 더욱 자세하고 선명하게 미디어에 표현되면서, 사람들은 문화산업이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라고 믿게 된다. (각주4)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스타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미디어에서 재현된 것을 현실 그 자체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 관찰 예능은 정제되지 않은 스타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편집되고 조작된 프로그램들일 뿐이며 SNS와 인터넷 뉴스에 공개되는 스타의 일상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켤 때마다 범람하는 스타들의 신체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은 스마트폰 화면이 현실 그 자체로 보이게 한다. 이제 재현된 정상성은 현실의 위치를 차지한다. 미디어의 재현을 통해 실제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현실에서 지워진다. 셀럽의 몸, ‘정상적인’ 몸은 말 그대로 현실이 되고 이제 우리는 ‘현실’의 몸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 외모지상주의의 구원자? 미용 산업

정상성에 대한 욕망은 상품으로 채워진다

아름다워지라는 문화산업의 요구는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대전제로 한다. 우리는 노력을 통해 ‘아름답고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몸을 얻을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식욕을 억제하고, 잠을 줄여 운동을 하고, 압박스타킹과 보정속옷으로 자신의 몸을 옥죄거나, 적어도 슬림해 보이는 옷을 찾아 입어야 한다. 이러한 통제가 매 순간 엄격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자신의 통제력이 부족하다며 자책하고 있을 때, 여러 미용 상품과 서비스는 통제를 돕겠다며 대중의 구원자로 등장한다. 음식의 지방흡수를 억제해준다는 알약, 맞으면 코가 오똑해지거나 종아리 알이 사라진다는 주사, 더는 못생기고 뚱뚱하지 않고 못생기게만 해주겠다는 PT 광고는 몸을 통제하고 싶은 우리를 유혹하기 충분하다. 우리가 미용 상품과 서비스에 집착하고 소비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눈에 띄지 않는, 어쩌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조금의 변화를 위해 의료 서비스나 미용 서비스, 각종 미용 상품들을 소비하고 작은 부분에 집착하게 된다.

미용 산업에 의한 ‘미’ 재탄생.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신체의 정상성은 닫혀있는 개념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특정한 대상 사이를 옮겨 다닌다. 미용 산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은 정상성의 이러한 특성을 정확히 이용한다. 기존의 이상적인 몸을 넘어 새로운 기준과 이에 따른 욕구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승모근이 아름다운 여자, 발목이 섹시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계속해서 몸의 각 부분에 정상성을 요구한다. 전방위적으로 노출되는 미디어와 미용 산업 광고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몸을 정육점에 걸린 고기처럼 파편화하고 등급 매기라고 요구받는다. 정상성의 개념에는 끝이 없기에 이러한 요구는 계속된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정상성은 획득할 수 없고, 우리는 정상성을 얻기 위해 계속 소비할 뿐이다. 정상적인 몸을 얻기 위한 소비와 꾸밈 노동은 그야말로 한계가 없다.

정상성이 기만적인 개념이며 사람들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데 쉽게 이용된다는 사실은 이상적인 ‘나’가 되라는 캐치프레이즈에서 두드러진다. 각종 문화 콘텐츠들은 끊임없이 내가 되거나, 나의 개성을 찾거나 혹은 나를 창조하라고 말한다. 다이어트와 성형을 통해 ‘인간 승리’를 했다거나 화장법을 바꾸고 예쁘게 꾸며서 아름다운 나 자신을 찾았다는 경험담을 전시한다. 또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더 아름답게 꾸미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나’가 된다는 것은 성립 불가능한 말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아닌 적이 없었으며 나라는 사람 혹은 개성은 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이 된 사람’이라는 기만적이고 허상적인 정상성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개성화된다는 착각을 준다. 이 때문에 각종 미용 산업 광고와 문화 콘텐츠들은 ‘자아 찾기’를 차용하여 작업 능력뿐만 아니라 겉모습을 계발할 것을 요구한다. 미용 산업은 대중에게 허상을 향해 달릴 것을 강요하며, 대중이 더 잘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미’에 도달할 때쯤 결승점을 바꿔버리는 기만적인 구원자이다.

  1. 저항 가능성을 잃다

전방위적인 노출: SNS, 1인 미디어, 일상

몸의 정상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자본이 송출하는 프로그램, 광고뿐만이 아니다. SNS와 1인 미디어에서 우리는 외모지상주의에 전방위적으로 노출되며,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을 재생산하는 주체가 된다.

모두에게 보이는 SNS에 나의 몸과 일상을 조작하지 않고 올리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아무리 폐쇄적으로 사용하는 SNS일지라도 재현하고 싶은 것만을 재현한다. 정상성을 표현하겠다는 의식적인 사고과정을 통해서 정상성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무의식적인 사고과정에서 SNS, 1인 미디어 이용자들은 잘 정돈된, 조금 더 아름다운 모습, 보여줄 만한 모습을 엄선해 게시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문화 콘텐츠에 정상성이 내재한다 뜻이다. 그러나 SNS를 보는 이들에게 SNS 속 내용은 재현이나 현실의 각색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다. SNS를 보고 우울감,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SNS가 우리 생활과 밀접해질수록 그 내용은 점점 더 우리의 몸을 잠식해나간다.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SNS, 1인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들과 평범한 우리도 아름다워질 수 있고, 아름다워짐으로써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글들은 조심스럽지만 노골적이게 우리도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조언해주는 다이어트 방법과 각종 뷰티 용품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당신도 그들처럼 관리해야 하며,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며 자꾸만 우리를 자극한다. 또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워졌는지, 새로 나온 미용 상품이 어떠한지 알고 싶어 하므로 이러한 콘텐츠를 찾아본다. 이 과정에서 관리에 대한 강박은 또다시 강화된다. 이 때문에 1인 미디어에서도 정상성이 범람하며, 이 정상성은 우리에게 아름다워지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각종 꾸밈 노동을 통해 미의 기준에 가까워진 이들이 아닌 주변 인물의 SNS도 나에게 신체를 꾸밀 것을 요구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SNS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공간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 역시 아름다운 곳, 아름다운 모습,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한 일상을 편집해 SNS에 게시한다. 그러나 게시물을 보는 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현실이라고 느낀다. 가깝게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이 나보다 ‘정상적이고 아름답다’는 사실에 더 큰 우울감에 빠져 꾸밈 노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이렇게 SNS를 하는 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을 재생산하며 동시에 외모지상주의에 그대로 노출된다. 1인 미디어와 SNS는 문화산업이 미처 영향력을 뻗치지 못한 우리의 일상까지 침투하여 외모지상주의를 노출시킨다.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미디어에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멋지고 아름다운 게스트들을 맞이하는 고정 패널들은 무식함, 키가 작음, 입이 튀어나옴 등 ‘비정상’의 특성을 부각하는 남성들이다. 친근한 외모를 가진 연예인의 ‘평균 이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콘텐츠들은 이미 포화상태이다. 1인 미디어에서도 ‘추’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을 담은 문화생산물들이 가득하다. 또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각주5)이나 ‘외국인 같은’ 한국인 등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산업은 끊임없이 정상성에 벗어난 인물들을 기존의 정상성의 기준에 포섭하여 무력화시킨다.

우선 정상성에서 벗어난 인물들은 비정상의 위치에 남아 기존의 정상성을 재생산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멋진 것은 더 멋지게, 추한 것은 더 추하게 그리는 것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개그우먼은 술을 먹고 퉁퉁 부은 모습으로, ‘남사스러운’ 춤을 추는 사람으로 계속해서 그려진다. 동네 아저씨 같은 캐릭터는 볼록 나온 배를 부각하고, 실수하거나 ‘추’한 모습을 계속해서 어필한다. 1인 미디어는 기존의 매체에서 정상성을 이용하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더 자극적으로 발전시킨다. 비교적 표현이 자유롭기에 ‘추’한 외모에 맞춰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가학적인 행동을 하고, 더 더럽게 음식을 섭취하며, 혐오 표현을 마구 남발한다. 이처럼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은 계속해서 이상하게 그려질 뿐이며, 이 과정을 통해 정상성은 공고해진다.

문화산업은 기존의 정상성에 도전하는 인물들 역시 정상성의 범주 내로 포섭해 버린다. 대표적으로 대중매체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을 다루는 방식이 그러하다. 사회적 기준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그들에게 당당해서 아름답다거나 ‘~~해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수식어로 또다시 조건을 달아버린다. 그들의 아름다움을 ‘특수한 미’에 가두고 ‘비정상’의 탈을 씌운다. 또는 그들의 신체를 파편화하여 정상의 틀에 맞는 부분(큰 가슴이나 큰 엉덩이, 혹은 뽀얀 피부)을 찾아내거나 그들의 풀 세팅된 모습만을 소비한다. 비정상을 비정상에 머물게 하거나, 비정상의 정상적인 부분들을 소비하거나, 아름다움의 공고한 기준은 남겨둔 채 조금의 포용을 베푼다. 심지어 문화산업은 정형화된 ‘미’에서 벗어난 이를 통해 정상성을 확장하기도 한다. 체중이 60kg인 걸그룹의 몸에서 글래머러스한 부분들을 강조하고, 50kg이하라는 정형화된 기준에 풍만한 가슴과 골반이라는 기준을 추가한다. 거식증과 빈혈에 시달리는 걸그룹에게 현실적으로 공존하기 어려운 기준들을 추가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문화산업은 정형화된 기준을 깨는 대상이 등장했을 때에도 기존의 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워야 할’ 대상에게 또다시 의무를 부과하거나, 비정상의 틀에 가두거나, 틀을 깨는 이를 포용함으로써 비판 가능성을 무력화한다.

또한, 사회는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사회적 무능 상태로 만들어 우리에게 ‘미’에 대한 강박을 주입한다. 우리에게 미는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끊임없이 갈망해야 한다. 모두가 미를 탐하니, 연쇄적으로 미 자체와 미에 대한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미를 탐하지 않거나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이는 점차 이상하고, 괴팍한 이가 된다. 이 사람에게는 다양한 사회적 기회들이 제한된다. 학창시절 다수에서 ‘추’하다고 여겨지고, 보편적인 위생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이를 놀림거리로 만드는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외모는 경제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름답고 정제된 이들 속에서 추한 이는 자꾸만 눈에 튀고, 사회 규칙에 부합하지 않고는 따라서 고용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비춰진다. 고용자는 노동자의 아름다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름다움을 직접 강요하기도 한다. 사칙으로 안경을 쓰지 않을 것, 청결하고 깔끔한 화장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명시적인 규정이 없더라도 관습과 예의라는 명목 아래 정상적인 외모가 될 것을 요구한다. (각주6) 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 이가 경제활동에 문제를 겪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정상성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며, 사회적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외모 꾸미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1. 그래서 어떡하라고?

문화산업에서 정상성은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대중은 정상성을 생산하는 문화 콘텐츠들에 다층적으로 노출되고 영향을 받으며 이를 재생산해낸다. 나는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이지만, 화장품 리뷰와 ‘다이어트 꿀팁’ 영상의 조회 수를 늘리는 재생산자이다. 동시에 나는 나와 나의 주변인에게 노골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꾸밈 노동을 강요하는 가해자이다. 이처럼 문화산업이 주입하는 외모지상주의와 이에 따른 개인의 꾸밈 노동은 다층적이고 지속적이며 한계가 없다. 외모지상주의로 점철된 이 세상은 문화산업의 지배를 받고 서로가 서로에게 꾸밈 노동을 강요하는 벗어날 수 없는 디스토피아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고 곧장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문제의 출발점인 상품 대량생산체제는 너무나 굳건하다. 대중문화는 우리의 삶을 전방위적으로 둘러싸고 있고, 외모지상주의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어디부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또한, 대중문화는 내부적 비판을 쉽게 포섭해버리거나 배제해 버리니 더더욱 막막하다. 고고하게 나 홀로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나 문화산업이 변화의 몸짓을 포섭한다면 문화산업 내의 모든 몸짓은 무의미한가? 정상성을 깨부수려는 문화 생산물이 다시금 정상성을 내포한다면 이러한 저항방식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외모지상주의에 저항하는 출발점에는 역시나 문제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있다. 범람하는 신체에 대한 수식어와 상징이 거짓임을, 나와 재현된 몸의 괴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현실을 터뜨릴 송곳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기에 문화산업에 질문을 던지는 문화 생산물을 쉽사리 무의미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문제 인식에 천착하지 않아야 함은 당연하다. 문화산업이 본질적으로 외모지상주의를 강화한다면 우리는 문화산업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 글은 독자에게 변화 가능성을 모색해주지 못한다. 필자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문화산업과 외모지상주의에서 우리를 구출할 구원자는 결국 우리 자신일 것이며, 외모지상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준이 아니라 ‘기준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문화산업이 사라진 이후에도 외모지상주의와 정상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계 없는 비판과 변화가 필요하다.

 

참고자료

장 보드리야르, 1992,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이상률 역

테오도어 W. 아도르노, 프리즘, 문학동네, 홍승용 역

테오도르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한길사, 홍승용 역

오팡시브, 2016,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 갈라파고스, 양영란 역

 

각주

각주1: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산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각주2: 디즈니와 같이 문화상품 혹은 서비스를 직접 생산하여 제공하는 산업체와 달리, 직접 문화를 생산하기보다는 개인들이 문화를 생산해 유포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제공해주는 문화산업체들도 있다. 페이스북, 유튜브, 아프리카TV, 트위치 등이 그 예이다. 개인은 이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창작물을 공유하고 수익을 얻는다. 플랫폼은 문화 생산물의 유통을 돕지만 동시에 개인의 자기표현방법과 문화 생산물의 유통경로를 한정시킨다.

각주3: 서동진, 2004, “비”의 성공 시대,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을 다시 생각한다, http://www.homopop.org/log/?p=4

각주4: 오팡시브, 2016,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 갈라파고스, 양영란 역

각주5: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란 모델은 말라야 한다는 전통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큰 사이즈의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활동하는 모델을 말한다.

각주6: 16년 CGV는 여성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생기 있는 피부화장, ‘눈썹 형태는 또렷이’, ‘붉은 립스틱’ 등의 용모 규정을 두어 논란이 된 바 있다. 알바노조가 17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성 아르바이트 근로자 495명 중 60%가 ‘단정한 용모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을 받거나 벌점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한,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인사담당자 1000명을 상대로 채용 평가에 외모가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한 결과 57.4%가 외모를 평가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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